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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폴 버호벤. 우리에겐 ‘원초적 본능’이나 ‘스타십 트루퍼스’ 같은 도발적인 작품으로 낯익은 이 할리우드 상업영화 거장의 고향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다. 2006년, 그가 사반세기를 떠나 있던 고국에서 만든 영화 ‘블랙북(Zwartboek)’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나치 치하 네덜란드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버호벤 특유의 색채로 그려낸 스크린에는 이스라엘 사해나 인근의 키부츠, 네덜란드 아르헴과 라이덴, 로센달, 암스테르담 외곽지역이 등장하지만, 주요 무대는 국제평화도시로 이름난 헤이그다.

헤이그와 ‘덴 하그’

한가로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한 농촌 주민.(좌) 한적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헤이그 도심광장.(우)

영화의 서두, 사해 인근의 집단농장 키부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인공 레이첼(캐리스 밴 허슨)은 우연히 과거 독일군 부대에서 함께 일한 로니(할리나 레인)를 만난다. 비록 영화에는 잠깐 등장하지만 ‘죽음의 바다’로 잘 알려진 사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특히 환자들의 휴양지로 유명하다. 염분 비율이 지상 최고로 알려진 사해는 일반 바닷물보다 염분 함유량이 12배나 높아 애쓰지 않아도 몸이 자연스레 물 위에 뜬다. 물 위에서 독서를 즐기는 방문객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영화는 레이첼의 회상을 따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네덜란드로 날아간다. 가족과 헤어진 레이첼이 농가에서 숨어 지내는 장면과 레지스탕스로 위장한 나치 앞잡이에게 속아 가족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장면을 촬영한 곳은 암스테르담 외곽의 잔세스칸스와 아르헴이다. 전형적인 네덜란드 전원풍경을 간직한 잔세스칸스는 북해와 암스테르담 사이에 위치한 시골마을로 특히 풍차가 유명하다. 낙농업이 발달한 이 마을은 어느 때 방문해도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전원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여행객이 끊이지 않는다.

아르헴 주변 운하를 따라 운행하는 화물선. 영화에서처럼 이 배를 타고 이웃나라로 갈 수 있다.

나치가 점령하고 있는 네덜란드를 벗어나 벨기에로 탈출하기 위해 경유지로 이동한 레이첼이 부모, 동생과 재회해 함께 화물선에 오르는 장면이나, 감옥에서 탈출한 연인 문츠 대위(세바스티안 코치)와 레이첼이 작은 배에 숨어 지내다 방송으로 독일 패망 소식을 접하는 장면은 아르헴 지역에서 촬영됐다. 암스테르담 동쪽에 있는 아르헴은 비록 내륙 도시지만 독일과 네덜란드를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로 육로는 물론이고 라인 강 지류를 따라 화물선도 빈번하게 오간다.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아르헴의 늪 지역은 데호헤벨뤼베 국립공원 등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된 매력적인 관광지다.

영화의 대부분이 촬영된 헤이그의 지명은 영어식 표기로, 네덜란드와 주변 국가에서는 ‘덴 하그’로 부른다. 레지스탕스인 한스를 도와 영국군이 제공한 인슐린과 무기를 운반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레이첼이 독일군의 검문으로 위기를 맞자 보안장교인 문츠 대위에게 접근해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이 이곳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레이첼과 문츠 대위가 헤어지는 영화 속 헤이그 중앙역은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돌지만, 실제 중앙역은 현대적인 건물로 리모델링되어 영화 속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실제로 영화가 촬영된 곳은 기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델프트 중앙역이다.

가족의 복수와 자신을 구출해준 사람들을 위해 독일군 장교에게 접근한 레이첼, 그녀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진 독일군 장교 문츠, 그들의 아슬아슬한 사랑은 헤이그에 있는 건물과 골목, 광장 곳곳에서 촬영됐다. 레이첼이 자전거를 타고 가던 거리, 스말 변호사의 사무실, 거대한 인파가 캐나다군을 환영하던 거리, 독일군 밀정으로 일하던 반 게인을 살해한 곳은 모두 헤이그 기차역에서 10분 남짓 거리인 도심지역에 있다.

여왕의 황금마차 행렬

그 가운데 영화 속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을 찾자면 옛 시청 광장을 꼽을 수 있다. 위풍당당한 외관과 달리 간결한 실내디자인이 독특한 성 야곱 교회와 옛 시청건물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연결된 골목과 신작로는 역사를 증언하듯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더욱이 정치와 문화도시로 알려진 헤이그의 진면목을 찾는 방문객이라면 누구나 이 거리에 가득한 흥미로운 볼거리와 맛깔스러운 음식점, 찻집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헤이그에는 명품을 주로 판매하는 파사주라는 쇼핑몰과 왕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노르데인데 궁전, 랑헤보르호우트 왕궁미술관, 브레디위스 미술관, 역사박물관 등 명소가 산재해 있다. 그 가운데 추천할 만한 곳은 단연 비넨호프 구역. 총리실, 외무부 등 주요 기관 청사가 있는 이 구역의 상징물로는 13세기 때 건축된 ‘기사의 저택’을 들 수 있다.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이 건축물은 좌우가 대칭인 고딕 첨탑과 아름다운 조각이 돋보인다. 매년 9월 셋째주 화요일 국회가 개원하는 날에는 여왕이 연설을 하기 위해 황금을 입힌 마차를 타고 이곳에 오는데, 시민들은 물론 이웃나라에서도 행렬을 관람하기 위해 비넨호프로 몰려든다.

그 밖에도 영화 ‘블랙북’은 대학도시로 잘 알려진 라이덴이나 벨기에 국경 인근 로센달 등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와 시골의 풍광을 찬찬히 카메라에 담았다. 나치 독일 치하의 헤이그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바로 그 실제 공간을 배경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옛 모습을 잃지 않는 유럽 도시들의 든든한 매력을 입증한다. 그 위에서 펼쳐지는 예측하지 못한 사랑과 배신의 긴박한 변주, 세월이 흘러도 계속되는 전쟁과 죽음이 자아내는 현실감 넘치는 공포는 버호벤 감독의 저력이리라.

국회의사당과 주요 정부기관이 밀집한 헤이그 비넨호프 구역.



사진/글·이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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