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을 뜨겁게 달구었던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고개를 숙일 때 햇살은 세상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인다.
해변 한 귀퉁이에서 카디스가 낳은 스페인 최고의 국민주의 음악가 파야(Falla Manuel de,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가 그랜드피아노를 치고, 러시아의 아름다운 발레리나 마신은 노을빛을 가슴 가득 안으며 태양을 향해 힘차게 솟아오른다.
붉게 물든 하늘에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피아니스트의 열 손가락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은 붉은 태양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고, 발레리나의 강렬해진 춤사위는 카디스의 해변을 열정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처럼 한 편의 영화가 그려지는 카디스는 인구 15만명의 작은 항구 도시지만, 3000년 전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도시가 건설된 후 로마, 서고트,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특히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 수많은 대형 선박이 항구를 가득 메워 세비야와 함께 선박도시로도 명성을 날렸다. 콜럼버스의 탐험선도 이곳에서 두 번이나 출항했고, 신대륙이 발견된 후에는 아메리카 대륙과의 물류교역 중에서 75%를 담당해 부와 명성을 쌓았다.
13세기 알폰소 10세가 이곳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해 그리스도교의 도시로 재건하자 카디스 곳곳에서 새로운 활력과 생명력이 넘쳐났다.
포도주와 광산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선박이 많이 필요하게 됐고 이를 제조하는 조선업이 번창하면서 카디스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가장 선진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부의 축적은 곧 해적들의 표적이 됐고 그들의 끊임없는 약탈과 침략 때문에 도시민들이 고통을 많이 받기도 했다. 카디스는 해군 사령부가 설치돼 있을 만큼 스페인에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카디스 기차역에서 빠져나오면 오른쪽으로 과거의 명성을 느낄 수 있는 카디스 항구가 있고, 건너편으로 구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카디스 여행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산후안 데
디오스 광장을 따라 좁고 기다란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그리 크지 않은 카테드랄이 코앞에 바짝 다가서 있다. 세비야나 코르도바를 거쳐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에게는 이 성당이 매우 작아 시시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성당에는 카디스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 마누엘 파야의 무덤이 있어 파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또한 성당의 크기는 작지만 카디스 시민의 정신적 메카이자 삶의 기반이 되는 곳이다.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내부에는 화려한 장식이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없지만 파야의 음악적 향기가 성당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다. 현란한 장식보다는 소박한 장식이, 밝음보다는 어둠의 색깔이 파야의 자취를 느끼는 데 훨씬 어울리는 것 같다.
파야의 예술적 향기를 가슴에 가득 담은 채 발길을 옮겨 성당 뒤로 돌아서는 순간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청량제 같은 시원한 바람이 카디스의 또 다른 색깔을 보여 준다.
성당 뒤로 눈이 부시게 푸른 대서양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바다 옆에는 쿠바의 말레콘 해안도로처럼 `캄포`라고 불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집들이 들어서 있고, 해변과 모래사장 주위로 많은 사람이 북적거린다.
카디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파스텔 톤 건물들은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하모니를 연출한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카디스의 명물 산세바스티안 성이다.
이곳은 프랑스의 몽생미셸처럼 바다가 갈라진 길을 따라 폭 2m가량되는 길이 성까지 이어져 있다. 좁은 길을 따라 예쁘게 휘어진 가로등이 나란히 서 있고, 제방 위에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산책을 즐기는 사람, 낚시꾼들이 가득 모여 있어 그동안 숨겨 놓았던 카디스의 황홀함을 한꺼번에 안겨다 준다.
바다를 향해 걷는 길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바다가 갈라져 갯벌이 속내를 드러낸 우리의 진도와는 사뭇 다른, 산세바스티안 성으로 이어진 길은 사람 키를 넘는 성난 파도가 휘몰아쳐 이방인의 방문을 경계라도 하듯 사정없이 앞을 가로막는다.
날이 저물수록 숨 가쁘게 몰아치는 파도는 제방에 부딪쳐서는 수만 개의 작은 포말이 돼 부서지고, 엷은 햇빛을 받은 포말은 카디스를 온통 은빛 세계로 물들인다. 제방이나 모래사장에 앉아 파야가 그랬듯이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지면 수평선 끝에서 열심히 달려온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며 쏟아내는 자연의 아름다운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바람의 세기에 따라 저절로 강약을 맞추는 파도소리는 마치 파야가 흑백 건반을 두드리듯 멋진 선율을 끝없이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