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에 건축된 성 스테필 성당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는 사실 관광지로 이름이 나 있는 도시는 아니다. 사바 강변에 자리한 자그레브는 항공ㆍ철도ㆍ도로 등 교통의 요충지이자 발칸반도의 관문으로 큰 활약을 해 왔다. 애석하게도 크로아티아를 찾은 사람들은 이 도시를 그냥 지나쳐 곧장 아드리아 해를 끼고 있는 두브로브니크나 스플릿으로 향한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인구의 4분의 1이 모여 사는 자그레브는 이 나라의 수도로서 꼭 한번 들러봄직한 도시이다. 크로아티아에서 제일가는 박물관과 레스토랑, 그리고 쇼핑센터에서 값진 시간을 보내 발칸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중세의 고풍스러운 이미지로 한껏 멋을 부린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는 1094년 로마 가톨릭의 주교구로서 유럽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3세기 중엽에는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도시는 점차 요새화되었고, 지금도 그 당시 몽골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성벽과 여러 개의 탑들이 현존한다. 그 후에도 자그레브는 오스만튀르크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침략을 받았지만 시민들의 강한 저항으로 도시를 지켜내 크로아티아의 역사에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20세기 이후 크로아티아는 `국가 재건`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모든 유대 관계를 정리하고 독립국이 됐는데 그 중심에 바로 자그레브가 있다.
중세시대 그 어떤 도시보다 혹독한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성장한 자그레브이기에 시민들의 가슴에는 조국과 자유에 대한 생각이 아주 남다르다. 로마 가톨릭의 종교적인 깊은 신앙심을 토대로 근면하고 정직한 성품을 지닌 시민들의 정신은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그레브는 두 개의 지역에서 사바 강 건너편까지 도시의 규모가 확대되어 지금은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오늘날 자그레브는 마치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세 개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몇 개의 굽이치는 언덕 위에 자리한 구시가지, 고르니그라드는 과거 크로아티아의 영화로움이 아주 매혹적인 곳으로 중세풍의 대성당과 국회의사당, 그리고 여러 개의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언덕 아래에 있는 도니 그라드는 유럽의 거대 상업도시에 비길 만큼 활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또한 새롭게 건설된 신 자그레브라고 불리는 신도시는 현대 건축과 도시화의 전시장을 연상케 하는 모던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현대와 과거의 모습이 동시에 공존하는 자그레브의 풍경은 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는 `옐라치치`라는 광장에서 서로 만난다.
중앙광장이라고 불리는 옐라치치 광장은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여행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광장 앞으로 덜컹거리는 전차와 자동차가 흐르고, 길을 따라 들어선 건물들은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처럼 고풍스러운 건물들로 꽉 채워져 있다.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다양한 상가들이 밀집된 구시가지 거리는 한마디로 낭만적이다.
중앙광장을 우측으로 끼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중세의 기품이 스며 있는 상부 도시, 고르니그라드에 이른다. S자로 휘어진 길이 끝날 즈음 구시가지를 상징하는 높다란 두 개의 첨탑이 눈에 들어온다.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1년 내내 머무는 대성당과 첨탑은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이곳 사람들의 자랑거리다. 구시가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대성당은 자그레브 시민들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가톨릭 신앙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높이 100m가 넘는 두 개의 첨탑을 가진 대성당은 슈테판성당이 서 있던 자리에 `축복받은 성모 승천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워졌다. 원래의 성당은 13세기 타르타르족이 침입했을 때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3세기 후반에 지어진 후 수많은 개보수 공사를 거친 것으로 옛 모습은 거의 없어지고 돔 지붕과 종탑 같은 부속물이 추가되었다.
지진 이후에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진행된 복원공사로 성당은 중세시대의 모습을 되찾았다. 성당 앞에는 금빛 찬란한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수십 m 족히 되는 기둥 위에 금색으로 칠해진 마리아상은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조각상이다. 그래서 이 성당을 `축복받은 성모 승천당`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내부는 5000여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무엇보다 대성당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바로크 양식과 신고딕 양식의 제단 등이 있고, 보물급 유물 10개 이상을 소유하고 있어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라고 부른다.
아주 이색적인 교회 지붕으로 유명한 성 마가교회도 자그레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성 마가교회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사보니아, 자그레브 시의 문장이 그려진 지붕 타일의 독특한 이미지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교회다. 이 지붕은 1800년대 후반에 제작되었다. 성 마가교회는 1200년대에 이미 문헌에 언급되어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때부터 교회는 수많은 변화를 겪었으나 로마네스크식 창문과 이반 파를러가 디자인한 고딕식 출입구만은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정문에 있는 벽감들에는 예수, 마리아, 성 마가를 비롯한 열두 제자의 조각상이 들어있다. 내부에는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조각가 이반 메스트로비치가 제작한 동상들이 서 있다. 요조 클리야고비치의 프레스코화도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자그레브에서 꼭 봐야 할 곳으로 `민족 박물관`을 추천하고 싶다. 이곳은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박물관이다. 도자기, 보석, 금, 악기, 섬유, 각종 도구, 무기, 고급스러운 의복 등 다양한 전시물들이 크로아티아의 문화 역사를 잘 나타내고 있다. 크로아티아 각 지방의 특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색상과 스타일의 민속 의상들은 정말 보아둘 가치가 있다. 특히 패그 지방의 레이스와 금사로 수를 놓은 슬로베니아 지방의 스카프를 놓치지 말고 구경하라고 권하고 싶다. 박물관 한쪽에는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일본, 남태평양을 여행하고 온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기증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소장품은 총 8만여 점에 이르나 한 번에 전시할 수 있는 양은 그중 4%뿐이다.
종교적, 비종교적 기념물과 거리, 광장, 공원들의 디자인에서 역사의 매 시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정신문화와 예술의 도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 문화와 과학, 경제, 정치에 걸쳐 크로아티아의 중심을 차지하는 자그레브가 이제 세계의 방문객과 여행자들에게 그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가는 길=크로아티아로 가는 직항편은 없다. 유럽의 관문이라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나 프랑스 파리를 경유해서 자그레브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 빈까지 대한항공을 이용한 후 그라츠를 경유하면 철도로 자그레브에 갈 수 있다. 그라츠에서 자그레브까지 기차로 3시간 소요.
△기후=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따뜻한 편이다. 5~9월이 여행하기 가장 좋다.
△음식=지중해에 위치해 해산물 요리가 무척 싱싱하고 터키 프랑스 이탈리아 요리가 발달했다. 음식이 대체적으로 기름지고 짠 편이다.
[글ㆍ사진 = 이태훈ㆍ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