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수가. 청천벽력이다. 배우 윤상현 씨와 비슷한 코스라 헬기 하늘 여행에, 낭만 야생화 트레킹을 기대했는데, 아니다. 정반대다.
물론 하늘을 날긴 한다. 탈것이 헬기가 아닌, 쇠줄로 가는 플라잉 폭스(flying Fox)일 뿐이다. 아, 걷기도 한다. 스위스 들판을 평화롭게 하늘거리는 야생화가 아니라 절대 녹지 않는다는 만년설, 빙하 트레킹일 뿐이다.
생각해보시라. 융프라우 꼭대기 역인 융프라우 요흐의 고도는 무려 `3454m`. 웬만한 여객 비행기의 순항 고도다. 그 고산에서 트레킹을 하고, 쇠줄을 타라니.
그래도 이를 악물 수밖에 없다. 매경 독자들에게 생생한 융프라우 현장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선 목숨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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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 정상에서 레저기구 ‘플라잉 폭스’ 를 타고 있는 본지 신익수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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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사실, 하이킹 천국이다. 대한민국 절반보다 작은 스위스 안에 조성된 하이킹 패스(path)만 6만㎞가 넘는다. 지구를 한 바퀴(약 4만120㎞) 반쯤 돌 수 있는 거리다. 수평으로 걷는 트레일 코스는 2만개나 된다. 제주 올레길 같은 하이킹 코스들이 거미줄처럼 나라 전체를 감싸고 있는 셈이다.
유럽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융프라우` 일대만 해도 76개에 달하는 하이킹 코스가 있다. 이 중 으뜸이 융프라우 정상에서 빙하를 따라 걷는 빙하 트레킹이다.
융프라우 하이킹은 대부분 인터라켄에서 시작된다. 인터라켄은 융프라우의 관문이다. 툰(Thunersee)과 브리엔츠(Brienzersee) 두 호수(Laken) 사이(Inter)라는 의미로 `인터라켄`이라 불린다.
융프라우 정상의 요흐까지는 기차를 탄다. 인터라켄 오스트역을 출발해 라우터브룬넨(796m)과 클라이네 샤이데크(2061m)를 경유해 융프라우 요흐(3454m)까지 오른다.대략 2시간30분이 걸린다.
시작은 철길이다. 분위기도 끝내준다. 그림 속 스위스의 낭만 여행, 그 자체다. 딸랑딸랑 워낭 소리 울리고, 형형색색 선명한 파스텔 톤의 자연이 어우러진다. 분위기가 살벌해지는 건 라우터브룬넨부터다.
나무 토막 가로질러진 낭만 철길은 예서부터 자취를 싹 감춘다. 높은 고도를 향해 고공행진을 해야 하는 만큼 궤도 사이에 흉측하게 굵은 톱니바퀴가 놓인다. 클라이네 샤이데크에 닿으면 기차를 갈아탄다.
그 유명한 융프라우 산악열차로 갈아탄다. 내년이면 설립 100주년이 되는 유서 깊은 철길이다.
이 기차가 심장이 뛰는 융프라우로 여행객을 안내한다. `처녀`란 의미의 융프라우(4158m). 수많은 산악인의 목숨을 앗아간 아이거 북벽(3970m) 묀휘(4107m) 등 알프스의 고봉들과 어깨를 맞댄 채 공포스럽게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융프라우 산악열차는 약 2㎞ 남짓한 초원지대를 거쳐 7㎞짜리 길쭉한 암흑 터널로 들어간다. 유럽의 고봉, 아이거와 묀휘의 몸통 속을 관통하는 놀라운 터널이다. 이 구간을 50분에 달할 만큼 천천히 오른다. 느릿느릿 가는 덴 이유가 있다. 고산 적응을 위해서다. 경사도 60도에 달할 만큼 살벌한 기울기다. 아예 서 있기조차 힘들다.
종착역인 융프라우 요흐. `요흐`는 우리의 `재` 엇비슷한 의미다. 역에 내리면 `Top of Europe`이란 파란 푯말이 눈에 띈다. 3454m, 1만1333피트라는 섬뜩한 문구도 보인다. 빙하 트레킹은 여기서 시작된다.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은 방한 점퍼와 선글라스. 트레킹은 깎아지른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지어진 `묀히산장`까지 이어진다. 오가는 데 두세 시간 정도 걸린다.
이게 장난이 아니다. 난생 처음 고산에 올랐으니 숨쉬기가 벅찰 정도. 허벅지는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저릿거린다. 남들은 빙하의 속살이라며 "Fantastic(환상이다)"을 연발하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 같다. 하늘거리는 야생화 밭을 낭만 질주(?)하고 있을 탤런트 윤상현 씨를 생각하니 더 이가 갈린다.
가는 길엔 그 끔찍한 `크레바스` 관람도 있다. 수많은 산악인의 목숨을 앗아간 고산의 공포스런 `틈`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멀리 산장이 보인다. 반환점인 묀히산장. 천근 같은 발을 겨우겨우 옮겨 산장에 올랐다. 이곳에선 모든 게 공짜. 무엇보다 의자에 앉으니 제대로 숨이 쉬어져 살 것 같다. 정신을 못 차리는 기자에게 맘씨 좋게 생긴 산장 주인이 그 유명한 `뚝배기 커피`를 내온다. 뚝배기처럼 큰 사발에 담겨 나온다 해서 한국인들 사이엔 뚝배기 커피라 불리는데 유럽인들은 `마운틴 커피`라 부른다. 돌아올 즈음에야 융프라우의 전경이 제대로 보인다.
다음 코스는 플라잉 폭스. 쇠줄을 타고 수백 m를 질주하는 아찔한 레저 기구다. 일반 땅에서야 수없이 타봤지만 이곳이 어딘가. 3000m가 넘는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다. 특공대도 아니고 그 고산에서 쇠줄 하강이라니. 게다가 윤상현 씨는 헬기로 이곳을 누비고 있을 텐데 고작 쇠줄 타기라니. 어쩔 수 없다. 체험은 체험이다. 평생 언제 한번 이런 고산에서 쇠줄을 타겠는가.
체험 장소는 역 뒷문 쪽이다. 쇠 데크로 이어진 점프대는 고산 30여 m 위에 아찔하게 버티고 있다. 일단 안전기구 착용. 그 뒤 계단을 오른다. 휭, 유난히 세차게 불어오는 융프라우의 칼바람. 그래도 뛰어야 한다. 한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래에서 기자가 뛰는 장면을 주시하고 있는 전 세계 여행객들.
"Ready(준비됐지)?" 안전요원의 굵은 바리톤 음성에 화들짝 정신이 든다. 그래, 뛰어야지. 히터 바람을 맞고 유유히 헬기투어를 하고 있을 윤상현 씨를 떠올리니 불끈 다리에 절로 파워가 실린다. "점프". 스스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점프. 파파팟. 융프라우의 칼바람이 기분 좋게 볼을 비집고 파고든다. 그래, 이 맛이다. 절로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100여 m를 하강했던 육중한 몸이 융프라우 만년설에 `쿵` 박힌다. 만년설에 반쯤 푹 잠긴 엉덩이. 축축해져도 좋다. 헬기 아니라 비행기라도 하늘을 날아 만년설에 푹 꽂히는 이 맛에 비할까.
▶▶ 융프라우 여행 팁
▷ 스핑크스 전망대를 꼭 볼 것
역에는 볼거리도 많다. 플라토 전망대나 빙하지대로 이어지는 역 뒷문이다. 밖으로 나서면 융프라우와 22㎞ 뻗은 알레치 빙하가 코앞에 펼쳐진다. 알레치 빙하는 유럽 최장 길이로 독일의 흑림지대까지 뻗어 있다. 압권은 스핑크스 전망대다. 고산 때문에 힘들더라도 꼭 가볼 것.
▷ 세상에서 가장 비싼 컵라면
고도 3000m에서 먹는 컵라면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이곳엔 있다. 그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컵라면, `신라면`이다. 가격은 우리 돈 1만원 정도. 뜨거운 물까지 포함된 값이다. 1만원이 문제인가. 스위스에서 컵라면이라는데. 꼭 한 번 맛볼 것.
※취재협조=스위스 관광청(www.myswitzerland.co.kr)
[융프라우(스위스) = 신익수 여행전문 기자]
[매일경제신문]